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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기록/방문기록

사울 레이터_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컬러 사진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울 레이터, 비비안 마이어와 함께 영화 <캐럴>의 배경에 영감을 준 사진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세상을 관찰한 사진가이며 80대가 되어서야 명성을 얻게 된 은둔형 사진가이다. 그는 인생 대부분을 드러나지 않은 채 지내면서 그것을 커다란 특권으로 여기며 만족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가 뷰파인더 너머로 바라본 시선은 드러나지 않기에는 너무나 빛나는 것이었다.

사울 레이터_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전시기간 : 2021.12.18 (토) ~ 2022.03.27 (일),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시간 : 10:00 ~ 18:00 (입장마감 17:00)
전시장소 : 피크닉


 

세상에서 잊히기를, 별거 아닌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다.
I was hoping to be forgotten. I aspired to be unimportant.

 


눈이 펑펑 오는 날, 날씨에 딱 어울리는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를 보러 나섰을 때에는 맑았었는데 지하철에서 내릴 때는 이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전시에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날씨였다. 사실은 전시 첫날이라 웨이팅이 좀 적을까 싶었고 날씨가 너무 추워서 관람객이 적을 것을 노렸던 것인데, 이런 운까지 따라주어 관람하는 내내 기분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영화 <캐롤>의 모티브가 된 사진가 사울 레이터, 라는 문장에 이끌리어 얼리버드 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캐럴>을 아직 본 적이 없다. 포스터나 스틸컷들은 많이 보았는데 정작 영화 자체를 오롯이 보지를 못했다. 솔직하게 쓰고 보니 더 머쓱하지만, 올 겨울이 가기 전에 숙제가 하나 생겼다고 치자.

나는 대단한 철학은 없다. 카메라가 있을 뿐. I don&amp;rsquo;t have a philosophy. I have a camera.
Red umbrella. c. 1958. 나는 염두에 둔 목적 없이 그저 세상을 바라본다.
Canopy, 1958.


1950년대에는 필름 인화에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고, 그 때 당시 컬러사진은 지금과 같은 기술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왜곡되어 표현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레이터의 컬러 사진은 혹평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사실 자기 홍보에도 지독한 혐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화조차 하지 않은 필름 박스들을 오랫동안 그의 뉴욕 아파트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We live in a world of color. We’re surrounded by color.

 

Untitled, 1950s.


그가 살던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산책하듯 촬영한 사진들에는 1950년대 뉴욕의 풍경, 일상,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필름 특유의 색감도 물론 좋았지만 그의 사진은 아무래도 그 시선 때문에 더욱 유명한 것 같다. 하퍼스 바자의 패션 사진을 찍을 때도 그랬지만, 대상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유리창 너머에서 보거나 초점을 일부러 다른 곳에 맞추게 되면 오히려 일반적인 시선보다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전시였다.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명한 사람들보다 빗방울 맺힌 창문이 더 흥미롭다

 

 

Harper's Bazaar


그리고 그의 오랜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솜스의 사진이 4층에 전시되어 있다. 유명해지기 전에도 그의 사진이 참 좋다고 한결 같이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녀를 회고하는 영상을 보면서 뭔가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가진 사진이라는 편견을 깨준 사진가라고 할까. 이번 전시에서 미공개 필름도 여럿 더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배경 음악을 정말 잘 선택한 것 같다. 같은 시간에 관람한 전시객들의 태도 또한 좋아서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전시회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유명한 사진가인지 잘 몰랐는데, 검색을 하다보니<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의 사진 에세이도 출간되었더라. 다가오는 12월 말에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영화도 참 궁금하다.

그의 사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SNS에 #saulleiterinspired 란 해시태크로 사진들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


원재 : In no great hurry: 13 lessons in life with Saul Leiter
감독/촬영 : 토머스 리치
출연 : 사울 레이터
수입/배급 : piknic / GLINT
러닝 타임 : 78분
관람 등급 : 전체 관람가
개봉 : 2021년 12월 29일

혹은 피크닉 시네마 (전시장 옆 건물)에서 7천 원에 관람 가능하다.
상영시간은 화~일요일, 일 3회 (오전 11시, 오후 1시, 3시)


 

관람 시 주의사항


안에서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핸드폰으로만 가능하다는 점. 아이폰은 라이브 포토로 촬영하고 갤럭시는 무음이 가능한 어플을 다운로드하여야 한다고 입장 전에 안내를 해주셨다. 이럴 때는 기본 카메라로도 무음이 가능한 내 아이폰 칭찬해. 다만 아이폰 13을 아직 받지 못해서 XSMAX로 찍게 된 것은 아쉬울 따름. 그리고 동영상 촬영은 불가하다. 나도 미공개 필름이 넘어가는 감각적인 그곳을 남기고 싶었지만 그냥 사진으로만 간직하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비가 오는 날, 더 가능하다면 눈이 오는 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